제목 오직 말씀으로(히브리서 4:12-13)
날짜 2014년 10월 26일, 종교개혁주일
1. 예수교가 조선에 준 은혜
춘원 이광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 소설가이자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손꼽힙니다.
1917년 그는 “청춘”이라는 잡지에 조선 교회에 대한 두 편의 글을 기고합니다. 7월호에 실린 첫
번째 글은 “예수교가 조선에 준 은혜”라는 제목의 글이었습니다. 일제 식민하의 조선은 절망과
암흑이 가득한 땅이었습니다. 춘원은 그의 글에서 조선에 기독교가 전파된 지 약 30여년이 지나는
동안, 기독교가 남긴 여덟 가지 좋은 점을 짚어주는데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희망이 끊어진 백성들에게 기독교 문명을 전하며 이 땅에 새로운 희망을
주었습니다. 둘째, 무너져 가는 도덕심을 재건하였습니다. 개화기, 혼란한 시대에 새로운 가치관을
심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셋째, 교육을 보급시켜 신교육을 대중화 시켰습니다. 당시 한국에는
교육시스템이 극히 열약했습니다. 초등교육기관으로 서당이 있었지만, 교육과정도 특별히
없었고, 또한 누구나 갈 수 있는 곳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선교사들이 학교를 설립하여
쉽게 교육을 받게 하였습니다. 넷째, 여성의 지위를 향상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부터
일부일처제가 시작되었고, 여성들 역시 학교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섯째, 조혼의 폐습을
없애고 결혼제도를 바르게 세웠습니다. 이 때로 부터 한국에 연애결혼이
보급되었습니다. 현대인들은 사랑을 하면 결혼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결혼
하고 나서 사랑을 키워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결혼제도에 대한 혁명적인
변화였습니다. 여섯째, 성경을 한글로 발간하여 한글의 위치를 높였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한문은 진문이라 하여 높이면서, 한글은 언문이라 하여 얕잡아 보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경전이 한글로 번역되어 사용되면서 한글의 품격이 높아졌습니다. 이는 루터가 독일어 성경을
발간하면서 독일어의 위상을 높아진 것과 유사합니다. 일곱째, 사상의 자주정신을
주었습니다. 기독교의 기본정신인 평등사상은 당시에 횡행하던 사대주의를 배격하는 주요한
정신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여덟째, 개인 개인의 자각심을 길러주었습니다. 단독자로서 하나님
앞에 신앙을 갖게 되는 기독교는 개개인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춘원은 개신교가 한국에 들어와 큰 은인의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뒤따라 사는 것이고, 또한 우리가
사는 곳으로 보다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곳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한국의 초기
기독교는 지금 우리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대단한 일들을 일구었습니다.
2. 금일 조선 예수교회의 결점에 대하여
그렇게도 교회를 칭찬하던 춘원은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후, 동일한 정기 간행물의 11월
호에 “금일 조선 예수교회의 결점에 대하여”란 글을 기고합니다. 여기서 그는 한국 기독교가
가진 4가지 병적 모습을 지적합니다. 당시 한국 최고의 지식인은 한국교회의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결국 영원히 교회를 등지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춘원이 왜 교회를 비판했으며, 교회를
떠났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한국 교회가 너무 계급적이라고 합니다. 목사님은 하늘처럼 높게 섬기고, 평신도는
바닥에서 순종하라고 합니다. 교회에서 평신도가 소위 바른 소리 하려 하면, 목사는 저주권이
있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목사 장로는 양반이고, 평신도는 상놈인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우리에게 놀라운 말씀을 전해줍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모두가 다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말씀입니다.
‘목사님, 모두 똑같으면 제가 설교해도 되나요?’ 이런 질문을 하신다면 저는 ‘글쎄요?’라고
대답하겠습니다. 모두 같다는 것은 모두 같은 역할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구별과 차별은 다른
것입니다. 구별은 역할에 대한 것이고, 차별은 지위에 대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각자 맡은
역할에 따른 구별은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결단코, 결단코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차별이 있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모두가 다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말은 모두가
서로를 섬기는 사람이고,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제가 설교를
하는 것이 거룩한 사역인 것처럼, 교우님들이 공부하고, 직장에서 일하는 것 역시 거룩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교회가 너무 교회 지상주의를 향한다고 합니다. 교회는 깨끗하고 구원받은 백성이라
말하지만, 세상은 망할 세상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악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만 존중하고 세상을 무시하니, 교회와 세상과의 벽이 너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강화도에 있는 철종외가에 가보면 마치 발코니처럼 사랑채 창밖으로 정자가 이어져
있습니다. 그리 높지 않은 정자인데 정자 마루의 사방에는 40cm 가량의 난간이
쳐져있습니다. 위험해서 쳐놓은 것은 아닙니다. 높지 않은 난간은 정자 아래서 시중을 드는 종들과
계급적 단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대부분 교회에서 설교단이 조금 높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
보이라고 높여 놓은 것입니다. (제가 좀 작아서 저희교회에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만약 강대상 둘레로 30-40센티 높이의 난간이 있다면, 어떤 기분이 드시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교회와 교회 바깥을 분리시켜놓는 그런 난간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에 발을 들여놓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를 세상과 가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거룩한 백성, 구별된 백성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성화된 삶으로 구분되는 것이지 우리 존재가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백성들은 멸망하는 백성, 저주받은 사람들,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구원받을 사람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에베소서 1장 10절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라 말씀하십니다. 천국백성과 지옥백성이라고 하는 이원론적인 거룩을
버리고, 진실한 거룩을 취하십시다.
셋째, 이건 참 말씀드리기 부끄러운 부분입니다만, 교역자들이 너무 무식하다고 합니다. 한국
기독교 초기에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안나온 사람이 목사님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그래서
상식에 안 맞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니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 설교에 너무 식상해하여 교회에
다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열약한 교육환경을 생각하면 일면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같은 문제는 단순히 학력에 대한 문제가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이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서울의 유명한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교회 건축을 하려는데 부지매입이 어려웠습니다. 전
교인이 함께 기도하던 중, 목사님께서 여호수아의 여리고성 기도를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성도들은 목사님의 말씀에 동의했고, 매일 새벽 교회에서 부지매입을 희망하는
주택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기도했습니다. 큰 소리로 기도도 하고 찬양도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역 주민들은 모두 이사를 갔고, 교회는 건축을 잘 마무리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이 일화를 간증삼아 말씀하셨고, 듣던 성도님들은 모두 아멘으로
감탄하면서 받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동네 주민들 대부분이
교회를 두고 시끄럽고 더러워서 집을 팔고 갔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믿음의 승리였고, 기도의 응답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교회는 완전히 비상식적인 집단, 이기적인 집단이었던 것입니다. 무데뽀(⽇, 無鐵砲)와
믿음은 다른 것입니다. 무데뽀와 믿음을 구별하지 못하면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넷째, 교회가 너무 미신적이라고 합니다. 병고치는 것, 복 받는 것만 말하고, 상식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은혜이고, 영생이기에 상식 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은혜와
영생을 얻는 사람들은 상식에 맞게 살아야만 합니다.
춘원은 이상과 같이 네 가지 한국 개신교의 병폐를 지적하였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춘원이 교회를 비판하고 교회를 떠난 지 거의 일백년이 지났건만, 교회는 크게 달라지거나 변하지
못했습니다. 변화 없는 교회는 생명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말씀에 따라 날마다 새로워지지 않으면
이미 굳어버린 것이고, 죽어가는 것입니다.
3. 한국 기독교는 무얼 하고 있는가?
1956년 1월, 함석헌 선생은 <사상> 잡지에 “한국 기독교는 무얼하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였습니다. 춘원이 교회를 비판한지 40여년이 지났지만, 그의 비판은 춘원의 비판과
많은 부분에서 유사했습니다. 변화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만 이야기하여 실천이 없다는 것입니다. 실천이 없는 신앙이
어떻게 백성을 이끌어가겠는가? 실천이 없으니 앉아서 기도만하고, 세상은 병 들어가는데 교회
예배당 안에만 있으니 어떻게 하겠냐? 라고 함석헌 선생은 말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하지만, 행함, 실천이 없으면 그 믿음은
헛것이라 성경은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2장 4절은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 신앙이 있습니까? 믿음을 통한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 안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피 흘리기까지
거룩하고 실천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은혜, 사랑, 구원에 합당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지금의 교회는 역사의식이 없다고 합니다. 일제시대에는 교인들, 지도자들이 나라
걱정을 하고 일했는데, 해방 후 교회는 역사의식을 잃어버렸다고 지적합니다. 3.1만세 운동의
실질적 지도자 이승훈 선생이 판사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했다. 조선 독립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도올 김용옥씨는 한국
교회가 예배당만 지으려고 한다고 비판합니다.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에서 그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회는 세 가지만 잘하면 된다. 믿어라. 돈내라. 집짓자.’ 이렇게 말하자
대학생들이 들으며 박수를 쳤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김용옥씨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진리, 나라걱정, 삶의 바른 의미를 추구하는 학생들에게 이런 교회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웠던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고 성도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항상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 지금 이 때, 이곳에
나를 보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나를 통하여 어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기
원하십니까?’ 고민하고 하나님과 역사 앞에 떳떳한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셋째, 성령은 받았는데, 도덕적인 수준이 올라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간증은 대단하지만
생활은 그렇게 깨끗하고 투명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시험보기 전에는
기도하면서, 시험시간에는 컨닝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며 감사예배를
드리고는 소득을 속여 세금 포탈하는 기업인도 있습니다. 새로운 집에 이사하여 감사예배
드리고는 이웃과 다투며 살기도 합니다. 교회 모임에 늦지 않으려고 신호위반을 합니다. 우리
역시도 이러한 모습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미국 이민교회를 잠시 담당하시면서 집집마다 심방을 하는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집집마다 대한항공 담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담요는 비행기에 탑승하는 동안
사용하라고 빌려주는 것입니다. 만일 직원에게 허락을 받지 않고 가져온 것이라면, 이것은
절도, 도둑질입니다. 대한항공 담요에는 “이 담요는 대한항공의 재산이므로 가져가실 수
없습니다.”라는 라벨이 붙어 있습니다. 제가 많은 비행기를 타보지는 못했지만, 다른 어느 항공사
담요에도 이런 말을 보지 못했습니다. 오직 대한항공과 아시아나 항공의 담요에만 이 같은 문구가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너무 많이 가져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 많은 수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성지순례를 가는데, 가이드가 참가하시는 목사님, 장로님, 집사님들께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앞으로 버스 여행을 많이 하는데, 에어컨 때문에 추우니까 비행기 타셔서 담요를
가방에 모두 챙기세요.’ 그 말에 따라 한 교회의 목사님으로부터 집사님들까지 단체로 대한항공
담요를 훔쳤습니다. 이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모든 한국 사람들이, 또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담요를 가져온다 하더라도 우리는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교회는 민중의 혼을 깨우지 못하고 교회 안으로만 불러들인다는 것입니다. 함석헌
선생은 “교회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합니다. 교회란 민중의 혼의 깨워서 참 민주주의,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세우는 게 교회가 할 일이라고 말합니다. 언뜻 듣기에 잘못된 신앙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의 자리, 상황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법칙, 하나님 나라의 정의, 그 나라의 사랑이
세상에 퍼져가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에 빛이다.”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빛이고, 교회의 소금이 아니라, 교회가, 그리고 교인이 세상에 나가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본이 되어야 합니다. 누가 보더라도 정말 대단한
사람들, 정직하고, 깨끗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 때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더 나은 세상, 바로 하나님 나라를 꿈꾸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가 세상에 본이 되지 못하고 우리끼리 만의 세상을 만들어 간다면 그것은 교회의
중요한 사명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맛을 잃은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버림받고
사람들에게 밟힐 것이라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슬프게도 21세기 한국 교회에서 그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4. 오직 말씀으로(Sola scriptura)
오늘은 종교개혁 497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1517년 마틴 루터는 가톨릭의 비 신앙적인
모습과 불합리한 것들을 개혁하고자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그는 수많은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500여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과연 우리는 얼마만큼 하나님 나라에 더욱 가까운 교회를 만들어가고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의 교회는 건강합니까?
오늘 종교개혁 주일을 맞아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이야기 했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합니까? 이제는 고쳐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 고쳐지지 않습니다. 사람의
습성들은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고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교회가 바로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말씀으로 바로 서야 합니다. 교회를 바로 세워서
병든 세상을 고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치료하기 위해서 교회는 건강해야 합니다. 교회가
완전할 수는 없지만, 완전하기 위하여, 깨끗해지기 위하여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혹자는 이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로마 가톨릭이 종교개혁이 필요할 만큼
타락하는데 1500년이 걸렸는데, 한국교회는 이걸 100년만에 따라잡았다고 합니다. ^^;; 그 농담이
너무나 슬퍼서 한참을 속상해하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한국교회가 욕을 먹는
것은, 또한 그러한 이슈를 세상에 쥐어주는 것은 일부 대형교회들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에게만 한정된 것이라면 결코 이렇게까지 욕을 먹지는 않을 것입니다. 현재 우리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바로 우리 자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의 문제입니다. 내가 바로
서지 못했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인터넷의 교회를 비판하는 글들을 SNS로 퍼 나르는 분들이 계십니다. 또한 그것을 가지고
자신이 속한 교회를 비판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제가 묻고 싶습니다. 교회를 비판하기 전에
그것을 위해서 한 번이라도 눈물로 기도하셨습니까? 한 번이라도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인지 말씀을 묵상하여보셨습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기 이전에 그 기준과
척도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종교개혁에는 3가지 표어가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말씀으로. 이 중에
가장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오늘 말씀의 제목인 ‘오직 말씀으로’가 아닐까
싶습니다. 로마 가톨릭은 언제나 Prima scriptura, ‘말씀이 우선이다’라고 말해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Sola scriptura, ‘오직 말씀이다’라는 주장을 했던 것입니다. 말씀만이 우리 신앙과
믿음의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공인된 성경을 신학적
용어로 ‘정경’이라고 말합니다. 정경을 라틴어로 Canon이라고 하는데, 이는 본래 길이를 재는
막대기라는 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개신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삶의 기준이자 척도를 삼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합니다. 또한 에베소서 6장 17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악한 세력을
물리칠 성령의 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검을
두려워하고, 꺼려합니다. 이 검을 들고 시험과 유혹을 물리쳐야 하는데, 오히려 우리가 베일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검을, 그것이 베어내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이 우리
자신을 베어 내도록 드리십시다. 때로는 그것이 고통스러운 일이 될지라도, 그 길만이 우리가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과감히 도려내고 잘라내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때에
비로소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무기가 되어 줄 것입니다. 오직 말씀으로
살아가십시다. 말씀으로 우리의 검이 되고, 우리 삶의 지표가 되게 하십시다.
개혁은 500년 전에 끝난 것이 아닙니다. 말씀 앞에 우리는 언제나 개혁을 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이 귀한 신앙을 물려주었습니다. 우리 역시도 이 신앙따라 우리 신앙과 교회를
개혁하십시다. 바른 교회, 아름다운 교회, 우리 자녀들에게 물려주면서 떳떳한 교회를 만들어
가십시다. 맑은 샘물이 되어 세상 사람들이 와서 마시고 갈증을 해소하는 우리 (베른/한소망)교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직 말씀으로 살아가자 외친지 497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삶은 말씀에
비추어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도려내야 할 말씀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려내려고
했음을 회개합니다. 이제 말씀으로 우리 발의 등이고, 우리 길의 빛으로 삼겠습니다. 말씀으로
검을 삼아 우리의 잘못된 삶과 신앙을 도려내겠습니다. 오직 주님 기뻐하시는 삶을
다짐하오니, 저희의 연약함과 믿음 없음을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명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