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개혁의 도시 베른
가을 학기 개학이 되기 전에 베른 시내를 돌아 보기로 했습니다. 집 앞을 지나가는 전차를 타고 다운 타운에 내렸습니다. 가로수의 단풍은 한국에서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은은하게 도시를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베른시는 마치 말 발굽처름 반원을 그리며 굽이쳐 흐르는 아레(Aare)강 품 안에 포근히 안겨있는 도시같았습니다. 남북으로 뚫려있는 넓은 도로에는 자동차들이 지나다니고 있었습니다. 도시가 세워질 당시에는 아마도 마차들이 지나다니던 거리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리 양편에는 웅장한 석조 건물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지층은 주로 상가가 들어서 있었고 이층과 삼층 건물은 주거지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건물들은 모두 연한 연두 색을 띈 듯한 석조로 되어 있었고 지붕은 옅은 붉은 색을 가진 기와 같았습니다. 창문 양쪽으로 열려 있는 나무 덧문이 무척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사람들이 지나 다니는 인도는 양쪽 길을 따라 세워진 건물 아래 아케이드로 연결되어 있어서 눈이나 비를 막아주고 있었습니다. 도시를 애워싸고 흐르는 아래(Aare) 강의 진 파란 강물과 파란 하늘, 그리고 건물 지붕의 붉은 색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베른시는 유네스코 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었습니다. .다운 타운에 우뚝 솟아 오른 두 건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는 국회 의사당 건물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을 향하여 비상하는 듯 높은 종탑을 가진 교회당이었습니다. 신학교 재학 시절 유럽의 종교 개혁에 감동하였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독일과 스위스의 개혁자들이 남기고 간 발자취의 긴 흔적이 5세기가 지난 후 멀리 극동에서 온 한 목회자의 시야에 고스란히 담겨 들어오는 것이 신기하였습니다. 16세기 유럽의 종교 개혁자들이 목숨을 바쳐 회복시킨 성경 중심의 신앙과 신학에 감동하여 유럽 땅을 찾아 온 학도에게 이 보다 더 큰 학습의 현장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베른 뮌스터(The Bern Münster Cathedral of St. Vincent)라고 불려지는 이 건물은 스위스에서 종교 개혁이 일어나기 전인 1421년에 기초를 놓았던 건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건물의 종탑이 세워진 때는 472년 후인 1893년이었습니다. 거의 오백년에 걸쳐서 건물이 세워진 셈입니다. 백미터 높이의 종탑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종탑입니다. 90미터가 되지 못하는 프랑스의 노트르담 성당의 종탑보다도 10미터 이상이나 높았습니다. 외양으로 볼 때는 로마 케토릭교회 건물 같았습니다. 사실 건물을 설계하여 건축하기 시작할 때만해도 당시 대부분의 케토릭 성당들 처럼 고딕식의 웅장한 대 성당 건물이었습니다. 그 성당 건물 건축 도중에 종교 개혁의 열풍이 베른에까지 불어 왔습니다. 그 성당 건물이 개혁 교회 예배당으로 바꿔지기까지의 그 길고도 험난했던 역사의 비밀을 이 건물은 가슴에 품고 있는 듯 했습니다. 1523년 1월에 개최되었던 로마 케토릭측과 종교 개혁 측의 토론회에서 쯔빙글리는 박식한 성경 원문의 뜻을 밝혀 그리스도는 구원을 위한 충족하고도 유일한 구세주가 되심과 연옥설의 부당함 등 67개 조항을 설명함으로 로마 케토릭 교회를 압도하고 승리하였습니다.
당시 취리히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던 쯔빙글리의 영향으로 베른은 구교의 영향에서 벗어나 종교 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대 성당이 건축 중이었던 1528년에 베른은 의회의 투표에 의하여 종교 개혁에 가담하기로 하였습니다. 루체른, 슈비츠, 우리(Uri) 주 등 스위스 산간 지역 케토릭 교회의 상당한 반발과 거센 항의가 있었지만 바젤, 취리히, 제네바와 함께 베른은 종교 개혁의 도시로 결정되었습니다. 특히 베른 의회는 성당 안에 세웠던 수 많은 로마 케토릭 교회의 성자 상들을 파괴하도록 결정하였습니다. 정문에 조각한 최후의 심판상을 보존시킨 것은 신기하였습니다. 아마도 그 조각을 우상시하는 염려는 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교회당 안 곳곳에 성자상을 세워 두고 숭배하던 습관을 가졌던 베른 성도들이 성자 상들이 철거되어 텅 빈 창고같은 예배당을 찾았을 때 어떤 생각을 가졌을 까 궁금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른 성도들이 이미 세상을 떠난 성자들에게 기도하던 대신에 하나님께 직접 기도할 수있게 되었다는 것은 여간 큰 축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물 한 쪽에 세운 화려한 마리아 상이나 베드로 상등의 성자들에게서 위로를 받으려고 했던 신자들이 이제는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위로를 받을 수있게 된 것은 베른 시민들에게 베푸신 주님의 큰 은총이었습니다. 길고도 어려운 신앙을 위한 싸움 끝에 베른 주의 모든 교회는 개혁 교회로 탈바꿈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국민들의 삶은 개혁 주의 신앙의 터전 위에 기초를 놓게 되었습니다. 그 영향은 매우 컸습니다. 베른 주 시민들에게 부과되는 종교 세도 개혁 교회로만 지출되었습니다. 베른 주 정부는 주립대학교 안에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부를 설치하였습니다. 학생 선발에도 신중을 기하였습니다. 베른 대학교는 본관 건물 외에 각 단과 대학 건물들을 베른 시내 곳곳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학부는 대학교 본관 건물 중에서도 요지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대학 진학을 앞에 둔 고등학생 들 중에서 신학 지망생들은 학업 성적이 우수하고 심성이 좋은 인품을 가진 학생들을 세심하게 살펴 추천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신학부를 졸업 하면 국가 고시를 거쳐서 목회자가 됩니다. 그는 국가 공무원 신분입니다. 아무리 작은 시골 마을의 교회에 부임하더라도 국가가 목회자와 그 가족의 생활비를 지급하고 사택과 목회 활동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속한 지역 주민들의 길흉사에 나서서 주민들을 돕고 목회적인 활동을 하게됩니다. 공립학교에서도 일주일에 한번 정도 성경을 가르치게 합니다. 이런 국가 정치, 사회적인 제도 장치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오래 전 종교 개혁자들이 남긴 값진 유산이라는 것을 부인 할 수가 없었습니다. 유서 깊은 종교개혁의 나라 땅을 밟을 수있게 인도하신 주님의 은혜가 가슴깊이 와 닿았습니다. 오래되고 낡은 건물 하나, 알프스 계곡의 들꽃 한송이조차도 소중하게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