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는 우리 나라의 경상 남북도를 합친 만큼의 면적과 약 750만 명의 인구로 아주 작은 나라이다. 그러나 스위스 하면 아름답기로 유명한 나라로, 누구나 한 번쯤 여행해 보고 싶은 나라 중의 하나이다. 일년 내내 눈에 덮여 있는 알프스산, 푸른 초원, 아름다운 호수, 이 모든 것이 정말 아름답다. 또한 앙리 뒤낭이 창설한 적십자사, 고아의 아버지로, 또는 청소년 교육자로 널리 알려진 페스탈로찌, 시계공업, 영세중립국 등등 여러 방면으로 우리 나라에도 너무 잘 알려진 나라이다. 그러나 이 모든 외적인 아름다움 보다 40여 년을 스위스에서 살아오면서 느꼈던 아름다움은 일상 생활로부터의 평화로움, 고요함, 검소한 삶, 근면함, 사회적인 안정, 민주적으로 정돈된 삶, 이 모든 것들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된 삶의 이면에는 믿음의 선조들인 종교 개혁자들의 노력이 있었음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저희 부부(김연주, 김정주)는 김정희 권사님의 동생으로, 김 애주 권사님의 동생으로서 이곳 스위스에서 가정을 이루고 생활하면서 믿음의 선구자들이 이루어 놓은 종교 개혁을 좀 더 생동감 있게 느끼며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 하나님께 늘 감사 드리며 살아가고 있다.
오늘날 이처럼 아름답게 가꾸어지고, 살기 좋은 나라인 스위스는 16세기 초까지만 해도 매우 가난한 나라였다. 그리하여 주변 국가, 즉 교황청, 프랑스 왕들을 위한 용병으로 전쟁터에 나아가 그들을 대신하여 싸우는 무적의 용사로써 활약하여 그들의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용병제가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었다. 전쟁에서 돌아온 그들의 삶은 매우 방탕해 지고 무질서해 져서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었다. 장로교의 뿌리가 된 종교개혁을 시작한 쯔빙글리도 용병들의 군목으로서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고, 부패된 사회의 현상을 목격하면서 복음을 통한 사회 개혁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또한 흑사병을 체험하였던 쯔빙글리는 루터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는 것을 복음의 핵심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렇게 취리히를 중심으로 쯔빙글리의 종교 개혁이 시작 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 개혁뿐 아니라 오늘날 의회민주주의의 시작이 되었다.
그러나 쯔빙글리가 1531년, 천주교와의 싸움에서 전사하고 난 후 불링거가 그의 뒤를 이어 취리히에서의 개혁을 이루어 나아가는 동안 ,제네바에서는 프랑스의 종교 탄압으로 인하여 피난생활을 하고 있던 칼빈 역시 독일의 루터의 영향을 받아 부패 속에 빠져 있던 제네바를 복음화 하며 개혁화하는데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개혁교회인 장로교회는 제네바가 아닌, 취리히에서 한 세대 이전에 시작되었고, 우리 나라에는 스코틀란드,영국, 미국을 통하여서 훨씬 후에 전하여지게 되었다.
이러한 종교개혁의 바탕 위에 스위스 사회는 복음화되었고, 근면, 검소하며, 노동을 중요시 여기는 사회로 변하여 오늘날의 부요한 나라가 되었던 것이다. 그 후 기독교는 국교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고, 국민이 국가에 바치는 세금 속에는 종교세가 들어 있다. 그러나 종교의 자유가 보장 되어 있으므로 원하지 않을 경우,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이처럼 일상 생활화 되어 있는 스위스의 오늘날의 교회는 안타깝게도 유럽의 여러 나라들처럼 많은 자리가 비어 가고 있다
40여 년 전, 우리가 이곳에 정착하였을 당시에는 한국교민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더욱이 교인의 숫자는 두말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양국간의(대한민국, 스위스) 국교가 맺어 지면서 교민의 숫자도 늘어나게 되고, 믿음의 식구들도 늘어 나게 되었다. 1977년 2월, 드디어 네 가정이 함께 모여 가정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 오늘날의 베른 한인교회의 시작이 되었고, 이것이 또한 스위스에서의 최초의 한인교회가 되었다. 그 당시에는 바젤 신학대학에 공부하러 오신 목사님들께서 바쁘신 가운데에도 매 주일 오셔서 설교말씀을 해 주셨다.
그 후, 1990년에 한국 장로교회(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측과 한국기독교장로회)와 스위스 개혁교회 사이에 신학적 교류의 장이 열리게 되었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스위스 교회로부터 종교개혁의 본래적인 의미를 보다 생동감 있게 검토해 볼 수 있으며, 스위스 교회는 한국 교회로부터 젊은 교회로써의 활기찬 모습을 접하여 볼 수 있다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교류는 목회자가 없는 베른 한인교회로써는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또한 기도의 결실이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이 교류를 통하여서 한국의 두 장로교단의 목사님이 번갈아 파송을 받아 가며 베른한인교회의 목회를 하시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2002년도에 취리히에도 형제교회인 한소망교회가 세워지고, 한 목사님께서 두 교회를 섬기시게 되었다. 이처럼 먼 이국 땅에서도 모국어로 예배 드리고, 성도와의 교제 속에 사랑을 나누며, 위로 받게 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다시 한번 감사 드린다.
*이 글은 종교교회(감리교) 월간지 "베데스다" 4월호에 실린 글을 올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