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전병두목사 베른 한인교회 설교를 맡다2019-06-07 09:18:38
작성인크리스찬타임스
베른 대학으로 유학이 결정된 후 한국에서 간절한 기도의 제목은 낯선 곳에 잘 적응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랜 목회 생활을 접고 학생의 신분으로 돌아가는 일을 잘 받아들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베른에 한국인들이 모이는 교회가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치 꿈 속에서나 일어날 것 같은 일이 현실로 나타 난 것이 놀라울 뿐이었습니다. 나를 위해서 어렵게 집을 구해 준 스위스 사람도 알지 못했던 한인 교회가 세 들어온 방의 바로 아래 층에서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니! 온 몸에 전율이 일듯한 현실이었습니다.
녹음기로 설교를 듣는 시간까지 포함하여 한 시간 정도의 예배가 조용히 끝났습니다. 그 주일의 성경 본문은 마태복음 7장 7절이었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녹음기 속의 설교자는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이의 기도라고 할찌라도 반드시 대답해 주실 것이니 중단하지 말고 계속해서 기도하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예배 후의 티 타임은 정겨웠습니다. 한 가족같은 십여 명의 교우들은 지난 한 주간 동안의 일들을 서로 이야기하기도 하였습니다. 처음 예배에 참석한 저에게 대한 관심이 매우 높은 듯하였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베른에 머물 것인지, 집은 어디에 얻었는 지 등으로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예배의 사회를 맡았던 분은 김연주라는 장로님이었습니다. 다음 주일부터 꼭 설교를 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교인들은 박수를 치면서 좋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빠르게 기도를 들어주실 줄은 몰랐다고 했습니다.
예배 후 김장로님은 자신의 집으로 초청해 주었습니다. 장로님이 타고 온 차는 볼보라는 메이커가 선명한 승용차였는데, 매우 육중해 보였습니다. 그는 부인 집사님과 대학생인 듯한 딸은 뒷 좌석에, 옆 좌석에는 나를 앉게 하였습니다.
유서 깊어 보이는 베른 시내 복판을 남쪽으로 가로질러 한참을 내려 가니 강을 감싸고 흐르는 아래(Aare) 강을 깊이 내려다 보는 다리가 나왔습니다. 그 한 쪽 옆에는 관광객 인듯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무엇인가를 쳐다보고 즐거워들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길을 따라 바라 보니 울타리 안 쪽에는 검정 색 곰들이 놀고 있었습니다. 어미곰인 듯한 큰 곰과 작은 새끼 곰들도 보였습니다. 장로님은 베른 주(Kanton Bern)의 깃발에 그려져 있는 동물이 곰이라는 설명과 함께 베른이라는 도시명도 곰이라는 이름에서 유래하고 있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곰 공원은 베른 시민들이 사랑하는 공원 중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장로님의 집은 숲이 우거진 마을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동화 속에 나오는 아름다운 숲 속의 마을 같았습니다. 깨끗하게 정돈된 응접실에서 바라보는 창 밖의 작은 정원을 지키는 나무 잎들은 단풍 빛이 은은하게 물들고 있었습니다. 김장로님이 스위스에 정착하게 된 것은 베른 대학교 부속 치과 병원에 연수 오게 된 것이 인연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서울대학교 치대를 졸업한 후 베른으로 왔지만 이곳에서 평생을 살게 될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었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를 빼닮아 보이는 딸도 아버지를 이어 치과 대학 입학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장로님 내외 분은 베른 교회를 바치고 있는 든든한 기둥같았습니다. 목회자가 없는 작은 교회를 지키며 장로님 내외 분은 열심히 교회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주말이 오면 장로님은 녹음 설교 테이프를 준비하기 위하여 고심하였고 부인 집사님은 예배 후 나눌 음식 준비로 토요일을 보내곤 하였습니다. 주일 예배 시간에 들려줄 마땅한 설교 테이프를 준비하지 못한 주일에는 멀리 바젤이나 취리히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신학생을 초청하여 설교를 듣기도 하였습니다. 베른 대학 신학부에는 한국 학생들이 거의 오지 않기 때문에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2천년 전 바울을 도우며 복음 전파를 위하여 헌신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문득 생각났습니다. 바울은 그 부부의 헌신에 감격하였습니다. 그들은 목숨까지 바칠 각오를 가졌던 훌륭한 믿음의 헌신자들이었습니다. 한국 교포들이 극히 적은 베른에 한국 교회를 세우고 오랫동안 교회를 지켜온 장로님 내외분이 존경스러웠습니다. 교인 중에 스위스 남편을 만나 결혼한 부인이 있었습니다. 외로움으로 우울 증세를 보이는 부인을 전도한 분도 장로님 내외분이었습니다. 한국의 한 고아원에서 소년이 스위스로 입양되어 왔습니다. 아름다운 나라에 입양되어 왔지만 적응하기는 의외로 힘들었습니다. 장로님은 그 소년을 친아들처럼 보살피며 좋은 상담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밤이 늦도록 장로님 내외과 대화를 나누었지만 이야기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장로님 내외분은 한국에서 제 발로 교회를 찾아온 목회자를 꼭 붙잡아 두고 싶어하는 것 같았습니다.
“다음 주일부터 꼭 설교를 해 주십시오. 주일 예배 설교 테이프 찾는 힘든 일은 오늘부터 중단합니다.”
장로님은 저의 두 손을 꼭 잡고 놓지를 않았습니다.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태도였습니다.
“네... 기도해 보겠습니다. 주일 전에는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장로님과 헤어진 후 늦도록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예’, ‘아니오’ 대답을 혼자서 수도 없이 했지만 시원하지 않았습니다.
새벽이 밝아 오는 듯 했습니다. 제네바의 종교 개혁자 칼빈이 생각났습니다. 그가 프랑스를 빠져 나와 스트라스부르그로 가는 길에 들렸던 제네바에서 뜻밖에 파렐 목사를 만났습니다. 파렐은 칼빈에게 제네바에 머물며 함께 종교 개혁에 동참할 것을 강권하였습니다. 거절하던 칼빈에게 파렐 목사님은 만일 당신이 거절한다면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최후 통첩을 하였습니다. 칼빈은 훗날 이렇게 회고하였습니다.
“기욤 파렐은 조언과 간곡한 경고로서가 아니라 무시무시한 저주로서 나를 제네바에 붙들어 두었다. 이는 마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을 나에게 얹어 잡으시려는 것 같았다” 이 일화는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토요일에 장로님께 전화를 하였습니다.
“장로님, 내일 주일부터 예배 설교를 맡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병두 목사유진중앙교회(오레곤 주 유진/스프링필드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