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의 문서를 정리하다가 2001년에 쓴 "나이론 신자"라는 글을 발견하고 다시 읽어 보았다. 이 글을 쓴지가 벌써 14년이 지났다. 과연 나는 얼마나 변하였을까? 이제는 70이 가까워 온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 자신을 관찰해보고 주변을 정리해야 할 시기인 것 같다. 신앙적으로 변한 것이 있다면 내 안에 있는 자만심이 좀 빠지고 서서히 하루가 주님의 은총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믿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죄인 여기까지 인도해주심 감사합니다. 주님이 있어 행복합니다.
나이론 신자
2001-07-12 이 명숙
벌써 25년이란 세월이 흘렀단 말인가? 내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지가 말이다. 어린 아이로 치면 출생해서 성장하여 결혼을 할 나이가 된 것이다. 과연
나의 신앙은 어른으로 성장했는가?
내가 예수님과 가까이 해 보고 싶었던
것은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이다. 국민학교
다닐 때에는 공책과 연필을 타는 재미로 교회를 다녔을 뿐이다. 그때 기독교 방송국에서 실시한 통신 교리강좌가
있었다. 교재를 보내주면 문제에 답을 써 보내는 것이었다. 성적이
좋으면 다음 것을 보내주곤 하였다. 교재를 따라서 답을 작성했다면 나는 아마도 백 점을 맞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생각하고서 답안을 보냈다. 성적이
나쁘다고 다시 해 보내라는 통지를 받고서 나는 그만두었다.
고등학교 때에 사귄 친구가 불교에
매우 심취되어 있었기에 나는 그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었다. 그래서 나는 사춘기엔 스님이 되고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하였다. 사춘기는 인생의 봄이란 말처럼 온갖 상념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사라지곤 하였다. 상상의 날개를 펴고 먼 미래를 꿈꾸기도 하였고 백마를 타고 나를 찾으러 온 왕자를 상상하기도 하였다. 그 후 착실한 스위스 남자를 사귀고 그와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면서 언젠가 예수를 믿어야겠다고 생각 했으나
실천에 옮기질 못하였다.
1977년에 베른 한인교회가 생겼다. 그것은 베른에 살던 한인들에게 매우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나는 딸 미라를 낳아 한창 기르는 재미에 빠져있었다. 그리고 두
아들 의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너무 바빴다. 하루가 언제 시작하여 언제 끝나는지를 모를 지경이었다. 그래서 교회가 생긴 것에 대하여 크게 관심을 기울일 수 없었다. 그런데
김 장로님 댁으로부터 교회를 나와 보라고 계속 권고를 받았다. 비교적 가깝게 지내던 사이라 체면을 세우기
위하여 나는 호기심을 품고 어떤 일요일 예배에 참석을 하였다.
처음 예배에 참석하였는데 아는 얼굴들은
거의 다 모인 것 같았다. 그래서 매우 반가웠고, 오영석
목사님의 설교는 내 귀에 잘 들어왔다. 나는 빠지지 않고 일요일 예배에 참석했다. 예배 후에 함께 커피를 마시고 빵을 먹으면서 친교를 하였고, 웃음의
꽃들이 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예배 시간 중간에 교회를 몇 번 빠져나간 있다. 어떤 부흥회 강사가 와서 설교를 했다. 그분이 그 자신을 지나치게
자랑을 하였다. 그래서 나는 이 바쁜 시간을 낭비하면서 왜 저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가 하고 나와 버렸다. 그랬더니 나를 따라 나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한 사람 두 사람씩
세례를 받기 시작했다. 결국 나만 남게 되었다. 오영석 목사님께서
‘이제는 미라 엄마도 세례를 받아야 하지 않겠어요?’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그때
나는 기다리기나 했던 것처럼 ‘나는 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그리고 나쁜 사람으로 취급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우리가 다 죄인인데 누구를 가리켜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소? 미라 엄마가 Traber씨를 많은 남자들 가운데서 남편으로 선택한
것처럼 예수님을 마음속으로 받아드리면 되요.’ 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러기로 결심했다. 세례를
받은 하나의 다른 이유는 지금 내가 기독교 영향권 지역에 살고 있다는 것과 내 자신을 낮추는 것이 불교가 말하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것보다
더 쉬울 것이다 라는 생각에서 였다. 아마도 78년 부활절
때에 세례를 받았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날자를 기억하지 못한다. 내
생일과 결혼 날자를 항상 잊고 있다. 그리고 남편도 그것들 기억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남편은 한번도 그것을 잊지를 않고 기억한다.
여러 목사님들이 일요일에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하시면서 그리스도교의 진리에 대하여 많은 설명을 해 주셨다. 매주 열심히 듣는 설교를 통하여
나의 정신 생활이 풍요롭게 되는 것을 느꼈다.
주님의 성령이 내 안에서 나의 삶을 인도한다고 실감은 아직 못했지만, 신앙생활을
하면서 매일 감사한 마음으로 살게 되었다. 이것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일어난 나의 내적인 생활의 변화였다. 그렇다고 설교와 교회의 생활이 항상 긍정적으로만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한
때는 교회를 안 나가기도 하였다. ‘교인으로서 기도를 해야 한다, 성경을 읽어야 한다, 봉사를 해야 한다, 우상을 숭배하지 말아야 한다’는 설교들은 마음에 평화를 가져오기 보다는 마음에 부담을 더해 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교회에 가지 말고 도덕적으로 더 잘 살면 되지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인간은 도덕적으로 잘 살려고 노력하지만, 늘 후회가 따르는
생활을 하기 마련이다.
나는 마음이 울적하거나 정신이 불
안정할 때에 수영을 간다. 온 몸에 와서 닿는 물의 촉감도 좋고, 숨이
차게 수영을 하다 보면 스트레스가 풀리기도 하고,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면서 앞으로 계속 나갈 수 있어
좋다. 오늘 나는 수영장에 가서
수영을 하는 동안, 신앙과 연결 시켜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울었다.
78년도에 어머니께서 한국에서 오셔서 나와 함께 잠간 베른 교회를 다니셨다. 그 후 한국으로
돌아가신 후 양로원에 잠깐 계셨다. 어머니께서 사시던 집으로 이모님이 들어가 작은 절을 만드셨다. 나는 어머니가 나와 다른 길을 가시는 것이 무한이 슬펐다. 왜 자식과
동행하시지 않으실까 하고 자문하였다. 어머니께서는 내 종교를 인정하시었고 나의 신앙생활을 방해하시지
않으셨다. 어머니께서 고혈압으로 쓰러지신 후 양로원에서 집으로 가셨다.
스님이신 이모님께서 어머니를 돌보셨다. 이모님의 고생은 형언할 수 없었다. 괴팍한 어머니의 마음을 맞춰드리면서, 이모님께서는 못 움직이는 환자를
돌보는 어려움을 온몸으로 감수하셨다. 나가라는 어머니의 재촉, 그러나
어떻게 환자 언니를 두고 떠날 수가 있단 말인가?
가끔 한국에 나가 이모인 스님을 지켜 볼 때에 과연 신앙 없이 그 고통을 견디어 내실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스님께서는 나보고 불교를 믿으라고 한 번도 안 하셨다. 그러나 당신은
매일 두 번씩 나를 위해 축원 하신다고 한다.
어머니께서 세상을 뜨셨을 때 물론 불교 식으로 장사를 지냈다. 차후 행사도 모두 절에서 했다. 엄격히 따지면 어머니 제사에 참가하지 않아야 했다. 기독교에서는
우상 숭배라고 한다. 나에겐 택할 여지가 없었다. 주님께서
연결해 주신 내 친 엄마다. 한스러운 일생을 마치신 어머니다. 길러
주신 이모님을 슬프게 해 드릴 수는 없었다. 나는 시키는 대로 했다.
어머니 제사상 앞에서 수 십번 아니 백 여 번을 절을 하며 울었다. 나는 서양식으로만 어머니에게
인사를 했지 우리 풍속처럼 큰 절을 해 본 적이 없는 것을 대신했다. 즉 나를 위해서 울었고 나를 위해서
절을 했다. 과연 주님은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꾸짖었을까? 지금
내 눈에서는 구슬 같은 눈물이 흘러 자판기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영혼은 불멸한다고 믿는다. 내 영혼이 죽음을 넘어서 주님과 함께 천국에서 다시 살 수 있기를 희망한다.
지옥은 있다. 지옥은 인간의 아름다운 관계가 파괴된 현실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므로 지옥은 살아 있는 우리 곁에 있다. 성경에서 지옥은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저주스러운 곳이다. 우리 마음에는 이기적인 욕구와 탐욕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우리들은 이 탐욕의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만 결코 벗어 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가끔 발목이 잡힌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옥의 고통을 느낀다. 심신의 고통이 커진다. 그러므로 우리를 죄와 저주와 죽음에서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필요하다. 그리고 신앙의 위기에는 우리의 공동체, 가족, 친구 그리고 교인들의 기도와 위로가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물론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과 관계에서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새는 교회 가는 것이 즐겁다. 갑자기 내 신앙이 더 돈독해 진 것은 아니지만,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설교말씀을 듣는 것은 큰 기쁨이다. 한 때는 평신도가 들을 수 있는 종교 강좌도 열정적으로 듣던 때도
있다. 그러다 오히려 한동안 퇴보한 침체 상태도 있다. 지금은
예전에 있었던 신앙심을 추구하려는 욕심의 초조에서 벗어난 편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생생한 진리, 생명을
새롭게 하는 말씀의 힘으로 나에게 다가오기를 기도한다.
이제 내게 그렇게 좋은 것도 그렇게
싫은 것도 없고, 예쁜 사람도 미운 사람도 없다. 이 것이
나이를 먹은 축복인지 아니면 슬픔인지 잘 모르겠다. 될 수 있는 대로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기를 힘쓰고 싶다. 나는 목사님의 설교 말씀 중에 동감이 가는 것은 아멘 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그냥 지나친다. 예배 시간에 진지한 표정으로 말씀을
듣고 기뻐하는 교회 식구들의 밝은 얼굴 보는 것이 매우 즐겁다.
나는 어느 목사님이나 인간이므로 장점과
단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목사님을 마음 속에서 가볍게 대하지 않는다. 목사님들은 주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알아 듣도록 표현하시려고
얼마나 노력을 하시는가? 목사님을 절대화하는 것을 거부할 뿐이다. 그분들의
가르침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깨달았다. 그분들의 설교를 들으면 삶에 유익하지 해로운 것은 없다고 느껴졌다. 여러 가지 여건들이 교회를 멀리하게 하는 요인들이 있을 것이다. 생활의
여건이나 개인적인 실망으로 아니면 어떤 인간적으로 피치 못할 고민으로 교회를 잠시 떠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떠한
이유를 막론하고 나이롱 신자일지라도 그리고 가끔 일지라도 교회를 안 다니는 것 보다는 다니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는 것을 내 경험을 통하여 말하고
싶다.
요즈음에 나는 한국을 자주 방문할
기회를 갖았고 비교적 오래 머물 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뿌리가 한국에는 더 이상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슬펐다. 물론 아는 사람들은 많다. 그들에게 나는 손님이다.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살고 있어 어느 사이 느낌에 차이가 있었다. 과연
내 친구는 누구인가? 우리 교회 식구들이다. 그들은 나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내 의식과 감정과 행동과 의사를 이해할 수 있다. 나도 그들을 많이 이해하려고 힘쓰고 이해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같은
신앙을 고백하면서 정기적으로 만나서 친교하고 대화를 함께 나눈 덕이다. 예수를 주님으로 모시는 신자들의 사귐에서 이러한 이해와 동정과 연대 감이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베른 한인교회는 우리들의 정신적 기둥 역할을 한다.
우리 교회가 앞으로 50주년이 되었을 때 내 신앙은 성숙해질 것인가? 그 때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주님 앞에 아름답게 설 수 있을까? 나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고 싶어진다.
‘주님! 교회에만 가면 그리던 순이 엄마와 철수 아버지와 악수할 수 있도록 해주시고, 정겨운 친구들과 깊은 우정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주시옵소서. 고락을
함께 나눈 우리 교회의 모든 식구들을 기쁨으로 보고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오래오래 갖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삶에
지쳐서 처지는 친구 있거들랑 그들의 등을 밀어 주면서 동행할 수 있는 기쁨을 누리게 하여주십시오. 우리들의
믿음과 희망을 더 새롭게 해주시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으려면 자신을 부인할 줄 알고 남의 시선과 인기에서부터 자유로워져야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즉 올바른 분별력으로 뭐가 우선권인가를 알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명철한
분별력을 갖게 도와 주십시오. 우리 베른 한인 교회의 신도들의 친교가 더 깊어지게 하시고, 날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게 해주십시오.
주님! 주님의 뜻 안에서 우리 베른 한인 교회를 세워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스위스에 살고 있는 우리 한인들이 주님의 교회를 통하여 생명의 길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베른 한인 교회가 날마다 말씀과 은혜 속에서 새롭게 발전하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21세기를 맞아서 우리 베른 교회가 새로운 희망을 볼 수 있는 은총을 베풀어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