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연주 장로님을 애도하며
제가 장로님을 처음 뵌 것은 1992년 2월 29일 취리히 공항에서였습니다.
그로부터 9년 동안 함께 베른한인교회를 섬겼고, 2001년
스위스를 떠난 후 10년 만에 한 번 더 뵈었습니다. 몇몇
교우들과 함께 브리엔쯔 호수를 하루 종일 산책을 한 것이 장로님을 마지막 뵌 일이 되었네요. 제가 한국에서
은퇴를 하면 한 번 더 가서 뵈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먼 나라에서, 장로님께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단 소식을 듣습니다.
장로님, 참 수고 많으셨습니다. 긴
생애 가운데 온갖 파란만장의 슬픔이 녹아 있고, 그것을 이겨낸 분투가 어려 있으심을 기억합니다. 전쟁의 화마가 아직 덜 가신 조국을 떠나 유럽에 정착을 하신 지 60여
년. 낯선 땅에서 치과의사로, 한인사회의 리더로, 교회의 장로로 사셨습니다. 무엇보다도 당신의 더 나은 다른 반쪽
김정주 권사님과 함께 흰머리가 파뿌리가 되기까지 해로하시면서 세 딸을 두시고 손자 손녀들을 보셨으니, 하나님의
크신 복을 받으시는 중에, 지상의 삶을 잘 누리셨습니다.
가까이서 뵌 장로님은 가족을 깊이 사랑하는 분이셨습니다. 장로님께서
가족에게 말을 건네시는 순간, 낮고 조용하고 따듯한 그 목소리에는 오직 가족에게만 흘러나가는 다정다감과
짙은 사랑이 묻어 있었습니다. 가족을 부르시고 말씀을 나누실 땐 아마도 성대 안에는 가족을 부르실 때만
사용하시는 울림판이 따로 있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저는 장로님께서 지니신 사랑의 깊이를 엿보았답니다. 고유한 사랑이 있으신 분만이 일반적인 사랑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겠지요. 가족에
대한 고유한 사랑과 책임에 있어서 한치의 흔들림조차 없는 단정하고 신실하신 생의 길을 용사처럼 살아가신 모습을 기억합니다.
9년 동안 함께 교회를 섬기시는 일에도 다르지 않으셨습니다. 한 주일도 빠짐없이 언제나 단정하게 자신을 하나님 앞으로 데리고 나오셨습니다.
작은 교회라 늘 마음을 빼앗길 일들이 많고도 많으셨지만, 하나님과의 시간만은 포기할 수
없는 고유한 시간이셨습니다. 주님과 교회를 위한 충성과 충정은 강렬하고 흔들림이 없으셨습니다. 언어와 문화와 제도가 다른 땅의 복잡다기한 현실이 주는 온갖 문제들에 맞서서,
안정적이고 좋은 교회, 평화와 위로가 있는 교회에 대한 열망과 추구 안에서 충성을 다 바치셨습니다. 한 때 9년이란 긴 세월 동안 목회를 책임졌던 목사로서 장로님의
그 간절한 열망에 부응해서 목회를 잘 감당하지 못한 저로서는 장로님께 많이 송구합니다.
살아계실 때 분명하게 표현하고 감사해야 할 일, 미쳐 충분히 표현
못 한 일이 있어, 이 애도의 시간을 빌어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1990년 6월 무렵 저는 서울에서, 스위스개혁교회연맹
국제담당 목사였던 하르트무트 뤽케 목사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스위스로 가기에 아직 1년 8개월이나 남은 때였습니다. 뤽케
목사는 스위스교단의 초청 절차가 지연되어 미안하고, 조금 더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 달라는 부탁과 함께, 스위스에 도착하면 제가 하게 될 일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내용이 담긴 손으로 쓴 편지를 보냈던 것입니다. 그 편지에서 베른의 닥터 김이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일 중의 하나는 김목사가 스위스에 오면 특별히 할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스위스에서 살고 있는 한국계 입양인들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스위스교회는
한국계 입양인들이 스위스에서 살고 있다는 것조차 잘 모를 때, 장로님은 한국 목사가 할 일 중의 하나가
그들을 섬기는 일이라는 것을 역설하셨던 것입니다. 장로님의 그 비전이 오늘 한국에서의 저의 삶이 되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살아계실 때 더 생생하게 감사 드리지 못했네요. 장로님, 감사 드립니다.
이런 일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장로님께서는 오늘날 우리가 소위 말하는
사회적으로 어려움에 내어 몰린 사람들에 대해 각별한 마음을 지닌 분이셨습니다. 어려움을 겪는 유학생들, 낯선 땅에서 곤경에 내어 몰린 교민들, 한국에서 온 나그네들, 그리고 아직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스위스 가정으로 입양된 한국계 입양인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사랑을
베푸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장로님께서는 주재국 대사나 소위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주저
없이 할 말을 하시는 분이셨기에, 때로는 사람들이 장로님께서 도움과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따뜻하고
깊은 정을 나누시며 힘이 되어주고 함께 식탁에 청하여 앉기를 즐겨 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잘 알아 채지 못하곤 했습니다. 아마도 장로님을 애도하는 자리이긴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장로님께서 다 이렇게 사실 수 있었던 것은, 장로님의 더 나은 다른
한쪽, 사랑하고 존경하는 김정주 권사님 덕분이라는 것, 장로님
천국에서도 잊으시면 안 된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장로님께서는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새 일을 해내시고 새
길을 여시는 분이셨습니다. 도전적이셨고, 결과를 내시기 위해
분투하셨습니다. 용맹스러우셨습니다. 사색하시고 늘 글을 가까이
두셨습니다. 가족을 뜨겁고 깊이 사랑하셨고, 한인교회와 한인사회를
부지런히 섬기시는 일에 충성스러우셨습니다. 그렇게 사시는 일, 보람과
기쁨도 있었지만, 때로는 수고로울 때도 없지 않으셨을 터인데, 중단하시지
않고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아 한 가지, 장로님은 아셨나요. 장로님 안에는 소년과 청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소년과 청년이었죠. 장로님께서 웃으실 때 큰 눈망울만은 가만히 있지만 눈빛 안에 깃든 기쁨이 고요히
흘러나오는 그 해맑은 소년의 웃음을 기억합니다. 주말이면 교회와 한인 사회를 위해 스위스의 여러 도시들을
오가며, 섬김의 삶을 사시던 청년 같은 모습 기억합니다. 키리히린다흐
집에서 정원 손질을 하시고 들판을 내다 보시며 사색에 잠기신 노년의 모습 떠올려 봅니다. 때로 그렇게
사시는 중에, 큰 눈망울이 흔들리며 물기에 젖는 혼자만의 순간도 없지 않았을 거라고 상상해봅니다. 삶의 희로애락은 누구라고 해서 특별히 비켜가는 것은 아니니까요. 장로님, 귀한 생, 잘 사신 생, 잘
마감하시고, 하늘의 안식에 드신 것, 주님의 섭리로 받으며
이 서신으로 송별사를 대신 합니다. 주님의 품에서 평화를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김정주 권사님, 애도의 시간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세상에 하나뿐인 권사님의 더 나은 다른 반 쪽이셨던 장로님을 보내드리는 시간,
달고 뜨거운 단 하나뿐인 사랑을 오직 권사님에게만 부어주셨던 그 사람 김연주를 보내드리는 시간, 잘
견디시기 바랍니다. 지상의 삶을 함께 사시는 동안 장로님을 사랑하시고 힘 되어 주시고 기도해주시며 보살피신
권사님의 사랑의 수고에도 큰 경의를 표합니다. 권사님 수고하셨습니다.
서리, 혜수, 혜리와 장로님의
사랑하는 손자 손녀들에게도 하나님의 위로가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엔 그런 아버지가 없다 싶을 만큼, 딸들을 사랑하셨던 장로님이셨는데, 아버님을 보내드리는 따님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서운하시겠어요. 다시 손잡아 보지 못하고 다정한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얼마나 허전하시겠어요. 험한 세상에서 용맹스럽게 살아내신 아버님의 아름다운 삶을 기억하시며, 그
기억 안에 계신 아버님과 함께 남은 삶을 더 행복하게 살아가시는 따님들이 되시길 바래요. 가서 함께
조문하고 애도하는 시간 가지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아마도 COVID19로 인해 많은 분들이 함께 하긴 어렵겠죠. 베른에서 함께 했던 교우 여러분들께도 장로님과의 송별을 애도하실 때, 주님의
은총이 임하시길 기도합니다. 사람이 사는 일에는 많은 좋은 일들이 있고 간혹 그늘이 드는 일도 있지요. 애도의 시간, 좋은 삶의 기억이 햇볕처럼 따뜻하게 다가오고, 어두움이 스치는 기억들은 잔잔하게 수습되는 성령의 깊은 역사와 감동이 임하길 기도합니다. 인류사의 보편적인 지혜 중의 하나는 애도의 시간은 용서와 화해의 시간, 긍정의
시간, 새롭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의 시간이자 새 출발의 시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장로님을 잃고 보내드리는
시간이 하나님의 축복의 새 시간으로 열리기를 기원합니다. 장로님의 주님을 향한 충성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한인사회와 교회공동체의 더 나은 새날을 열어내시는 소명의 시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저도 장로님과 함께 했던 귀한 기억들 안에서, 또한 교우 여러분들과
함께 했던 아름다운 기억들 안에서 저도 한국에서의 삶을 더 잘 살아가리라 다짐합니다.
산 자와 죽은 자들의 주님께서 장로님과 지상에 남은 우리 모두에게 자비와 안식, 은총과 평화를
내려주소서. 아멘.
2020년 6월 10일
서울에서 김도현 목사 배